공부법의 과학

형광펜으로 칠한 만큼 공부가 됐을까 — 같은 문단을 세 번 칠해 보며 확인한 것

thinknavi 2026. 10. 19. 20:37

시험 기간이 끝난 교과서를 펼쳐 보면, 어떤 페이지는 거의 전부가 노랗습니다. 칠할 때는 분명 중요해 보였습니다.

 

2013년 미국 심리학자 존 던롭스키(John Dunlosky)와 동료 네 명은 학생들이 흔히 쓰는 공부법 열 가지를 골라, 수백 편의 연구를 바탕으로 쓸모를 매겼습니다. 형광펜 칠하기와 밑줄 긋기는 '효과 낮음'으로 분류됐습니다. 다시 읽기, 요약하기와 같은 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연구를 모아 보면 이야기가 조금 더 섬세해집니다. 형광펜 자체가 쓸모없다기보다, 어떻게 칠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갈립니다. 말로 설명하기보다 직접 칠해 보는 편이 빠릅니다.

연습용 문단

아래는 이 블로그의 분산 학습 글에 나온 내용을 교과서 문체로 바꾼 문단입니다. 이 문단을 세 사람이 칠했다고 해 보겠습니다. 아래 예시에서 노란 바탕이 형광펜을 칠한 부분입니다.

분산 학습이란 같은 양의 공부를 한 번에 몰아서 하지 않고 시간 간격을 두고 나누어 하는 방법이다. 여러 연구에서 분산 학습은 몰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장기 기억에 유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최적의 간격은 기억해야 하는 기간에 따라 달라지며, 시험이 멀수록 간격도 길어진다. 간격이 지나치게 길면 복습이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일이 되어 효과가 줄어든다.

세 사람이 칠한 결과

A의 문단 — 거의 전부

분산 학습이란 같은 양의 공부를 한 번에 몰아서 하지 않고 시간 간격을 두고 나누어 하는 방법이다. 여러 연구에서 분산 학습은 몰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장기 기억에 유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최적의 간격은 기억해야 하는 기간에 따라 달라지며, 시험이 멀수록 간격도 길어진다. 간격이 지나치게 길면 복습이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일이 되어 효과가 줄어든다.

 

다 중요해 보여서 다 칠했습니다. 나중에 이 페이지를 다시 펴면, 칠한 부분과 칠하지 않은 부분의 구별이 없습니다. 칠하는 동안 한 일은 읽으면서 손을 움직인 것뿐입니다.

 

B의 문단 — 용어만

분산 학습이란 같은 양의 공부를 한 번에 몰아서 하지 않고 시간 간격을 두고 나누어 하는 방법이다. 여러 연구에서 분산 학습은 몰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장기 기억에 유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최적의 간격은 기억해야 하는 기간에 따라 달라지며, 시험이 멀수록 간격도 길어진다. 간격이 지나치게 길면 복습이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일이 되어 효과가 줄어든다.

 

깔끔해 보입니다. 하지만 칠한 단어 세 개만 다시 봐서는 문단이 말하는 관계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문단의 핵심은 "시험이 멀수록 간격도 길어진다"는 관계인데, 그 부분은 칠해지지 않았습니다.

 

C의 문단 — 문장 하나, 그리고 여백에 질문

분산 학습이란 같은 양의 공부를 한 번에 몰아서 하지 않고 시간 간격을 두고 나누어 하는 방법이다. 여러 연구에서 분산 학습은 몰아서 공부하는 것보다 장기 기억에 유리한 것으로 나타났다. 다만 최적의 간격은 기억해야 하는 기간에 따라 달라지며, 시험이 멀수록 간격도 길어진다. 간격이 지나치게 길면 복습이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일이 되어 효과가 줄어든다.
(여백) 시험이 2주 뒤면 간격은 대략 며칠? 너무 길면 왜 손해?

 

C는 칠하기 전에 "이 문단에서 하나만 남긴다면?"을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여백에 질문을 적어서, 나중에 다시 볼 때 답을 떠올려 보게 만들었습니다.

연구는 이 차이를 어떻게 봤나

2022년 칠레와 미국 연구자들(Ponce, Mayer, Méndez)은 1938년부터 2019년까지 나온 형광펜 연구 36편을 모아 다시 분석했습니다. 결과를 나눠 보면 이렇습니다.

누가 칠했나 기억 이해
학생이 직접 칠함 조금 도움 됨 뚜렷하지 않음
교사·교재가 미리 칠해 줌 도움 됨 도움 됨

 

몇 가지가 눈에 띕니다.

 

직접 칠하기는 내용을 '기억'하는 데는 조금 도움이 됐지만, '이해'하는 데는 뚜렷한 효과가 없었습니다. 단어나 사실을 떠올리는 시험에서는 약간 나았지만, 내용을 응용하는 문제에서는 차이가 작았습니다.

 

대학생에게서는 효과가 보였지만, 초·중·고 학생에게서는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고르는 일 자체가 어느 정도 배경지식을 필요로 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칠해 둔 부분을 나중에 다시 읽는 복습은 효과가 뚜렷하지 않았습니다. 칠한 부분만 다시 보는 것은 결국 다시 읽기의 한 종류이고, 다시 읽기는 던롭스키의 분류에서도 '효과 낮음'이었습니다.

 

잘 골라서 칠해 준 교재는 도움이 됐습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사람이 칠해 주면, 읽는 사람의 주의가 그쪽으로 갑니다. 거꾸로 말하면, 형광펜의 가치는 '고르는 판단'이 맞았을 때 생긴다는 뜻입니다.

A·B·C를 다시 보면

A는 고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형광펜이 할 일이 없었습니다.

 

B는 골랐지만, 문단의 핵심이 아니라 눈에 띄는 단어를 골랐습니다.

 

C는 적게 골랐고, 무엇보다 칠한 부분을 다시 읽을 거리가 아니라 다시 떠올릴 거리로 바꿨습니다. 연구들이 공통으로 효과가 크다고 보는 꺼내 보기를 형광펜에 붙인 셈입니다.

형광펜을 계속 쓴다면

  • 처음 읽을 때는 칠하지 않습니다. 한 번 끝까지 읽어야 무엇이 핵심인지 보입니다. 두 번째 읽을 때 칠합니다.
  • 한 문단에 한 문장 이하로 제한합니다. 다 칠하고 싶어지는 페이지일수록, 그 페이지를 아직 이해하지 못한 것일 수 있습니다.
  • 단어가 아니라 관계를 칠합니다. "A면 B다", "A보다 B가 낫다" 같은 문장이 시험에도, 실제로 써먹을 때도 남습니다.
  • 칠한 문장을 질문으로 바꿔 여백에 적습니다. 복습할 때는 칠한 부분을 가리고 질문에 먼저 답해 봅니다.

 

형광펜을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노랗게 칠해진 페이지가 공부한 양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는 점만 기억하면 됩니다.

참고한 연구

  • Dunlosky, J., Rawson, K. A., Marsh, E. J., Nathan, M. J. & Willingham, D. T. (2013). Improving students' learning with effective learning techniques: Promising directions from cognitive and educational psychology. Psychological Science in the Public Interest, 14(1), 4–58.
  • Ponce, H. R., Mayer, R. E. & Méndez, E. E. (2022). Effects of learner-generated highlighting and instructor-provided highlighting on learning from text: A meta-analysis. Educational Psychology Review, 34.